삭막한 자동차 번호판에 개성을 부여할 순 없는 걸까

2019-08-29 09:57:22

자동차 번호판 변경, 이왕 하는 거 확 바뀌었으면

“자동차 번호판은 용도와 목적에 충실해야 하지만, 부수적인 효과도 무시할 수는 없다. 획일적인 딱딱한 번호판을 개성 넘치는 소품으로 바꿔야 한다.”



[임유신의 업 앤 다운] 번호는 단순한 숫자 조합이 아니다. 간단해 보여도 의미가 크다. 자체 의미보다는 번호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관심이 크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같은 숫자가 반복된다거나 일정한 규칙성이 있거나 숫자 발음이 특정 단어와 비슷하면 특별해 보인다. 사람들은 대체로 남들 앞에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어서, 좋은 번호는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여긴다.

대표적인 번호는 휴대폰 번호다. 뒤에 8자리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번호의 가치가 달라진다. 자기만족 목적으로 좋은 번호를 찾기도 하지만, 영업이나 사업에 효과를 내기 위해 번호를 신경 써서 고르기도 한다. 좋은 번호는 아예 골드 번호라고 해서 통신사에서 특별히 관리한다. 골드 번호도 숫자 조합의 규칙성에 따라 등급이 나뉜다. 좋은 번호는 한정적이라 운이 좋든 노력해서 얻든, 손에 넣으면 희소성에 의한 만족감은 커진다.

자동차 등록번호도 의미가 남다른 번호다. 우리나라 번호는 숫자나 문자를 조합한 딱딱하고 정형화된 형식이지만 그 속에서 의미를 따져 가치를 부여한다. 분류 기호에 불과하고 공식적으로 좋은 번호를 정해 놓지는 않았어도, 통념상 인정하는 좋은 번호는 존재한다.



좋은 번호가 특별한 이유는 눈에 띄고 좀 더 개성 있어서다. 소유자의 달라 보이고자 하는 욕구를 만족시킨다. 단순한 분류 기호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부질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자동차에 대한 관심 측면에서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자동차는 운송 수단이자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다. 무엇인가 차별할 방법이 나온다면 활용해야 한다. 등록 번호는 자기가 원한다고 받을 수 있지 않기 때문에, 좋은 번호를 받으려면 운도 따라야 한다. 쉽게 얻을 수 없기에 좋은 번호의 가치는 더 높아진다.

번호판 변경은 중대한 작업이다. 사회 각 곳에 미치는 영향이 커서 연관된 기반 시설을 손봐야 하는 대작업이다. 신중하게 이뤄져야 하고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부수적으로는 자동차를 꾸미고 돋보이게 하는 기회를 준다. 번호판 디자인이나 구성에 따라 자동차가 풍기는 분위기도 달라진다. 번호판 변경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어서 어떤 방향으로 이뤄질지 관심이 쏠린다.



9월부터 자동차 번호판이 바뀐다. 7자리에서 8자리로 한 자리가 늘어나고 모양이나 색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7자리 번호가 거의 고갈 상태라 새로운 번호를 확보하고자 자릿수를 늘렸다. 대상은 일반 승용차와 렌터카다. 번호판 변경 이야기가 나왔을 때 큰 폭 변화가 있을지 기대했지만 숫자 하나 늘어나는 데 그쳤다. 그래도 좋은 번호는 늘어났기에 번호를 새로 받거나 바꿀 사람이라면 기대할 만하다.

이번에는 작은 변화에 그쳤지만 과거 우리나라 자동차 번호판은 굵직한 변화를 여러 차례 거쳤다. 큰 변화를 보면 2004년 지역명과 번호가 적힌 녹색 번호판이 전국 번호판으로 바뀌었다. 지역 표시가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거주지를 옮길 때 번호판을 바꿔 달아야 하는 불편이 따라서다. 지역 번호판은 지역 명칭 뒤에 적힌 숫자가 구 단위를 표시하기 때문에, 좋은 동네 번호판을 얻고자 거주지가 아닌 동네에 등록하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2007년부터는 아래 두 줄이던 번호가 한 줄로 바뀌고 색상도 하얀색으로 변경하고 긴 번호판이 생겼다. 유럽형을 따른 변화였는데, 유럽 지역 번호판을 흉내 내 한쪽 끝에 스티커를 붙이는 일이 한때 유행했다(우리나라 번호판 규정에 따라 불법이다).



과거보다 지금 번호판이 세련되고 간결해졌지만 우리나라 번호판은 제약이 많다. 여러 개 중에 고를 수는 있지만 자신이 마음대로 정할 수는 없다. 번호판 색상이나 모양도 동일하고 꾸미지도 못한다. 번호판의 기본 역할에는 충실하지만 차의 개성을 드러내는 용도로는 부적합하다. 기능과 용도에만 치우쳐 삭막한 면이 없지 않다.

우리나라 번호판도 자유도를 높일 수 없을까? 외국은 번호판 자유도가 높은 곳이 꽤 된다. 숫자나 문자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고르거나, 번호판 배경에 그림이나 문구를 넣을 수도 있다. 네모난 모양에서 벗어나 지역 특색에 맞게 디자인하기도 한다. 번호를 사고팔거나 경매에 부치 수 있기도 하다. 좋은 번호는 수억 원에 거래되기도 한다. 번호판을 관리하는 당국이 번호 배분을 수익 사업으로 운영하는 곳도 있다.



이런 높은 자유도가 꼭 긍적적이지는 않다. 식별력이 떨어지거나 좋은 번호를 얻기 위한 경쟁이 과열되거나 특정 계층에 좋은 번호가 집중되는 부작용도 나타난다. 만약에 외국 사례를 따른다 하더라도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기반 마련이 우선이다.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획일적인 번호판 운영이 정답은 아니라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자동차 번호판은 원래 목적에 우선해야 한다. 인식하기 쉽고 효율적인 자동차 관리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그렇지만 기본적인 목적을 만족시킨다면 좀 더 자유롭게 할 필요가 있다. 자동차를 꾸미는 용도, 개성을 드러내는 소품, 소유자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부속품 등 용도는 확장하기 나름이다.



우리나라 도로는 삭막하다. 자동차도 종류가 그리 다양하지 않고 색상도 무채색 위주다. 번호판까지 획일적이다. 번호판 자유도를 높여 개성 넘치는 번호판이 늘어나면 도로도 밝아진다. 지금처럼 운 좋게 좋은 번호를 받은 일부만 만족하는 데 그치지 않고, 번호판에 만족하는 사람도 늘어난다. 철판 하나 바꾸는 작은 변화일지 몰라도 자동차 문화와 도로 분위기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임유신

임유신 칼럼니스트 : 자동차 전문지 <카비전>, <모터 트렌드>, 등을 거쳤다. 얼마 전까지 글로벌 NO.1 자동차 전문지 영국 BBC <탑기어>의 한국판 편집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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