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차’ 자리 차지하고 있는 그랜저,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2018-07-18 15:13:09

제대로 된 ‘국민차’ 어디 없을까요?

“우리나라는 준대형 고급차가 가장 많이 팔린다. 많이 팔리는 데 시비를 걸 수는 없지만, 그런 형상이 정상인지 아닌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임유신의 업 앤 다운] 국민차 하면 대우자동차 티코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1991년 처음 나왔고 가격은 기본형이 300만 원을 조금 넘었다. 크기는 작았지만 가격도 싸고 연비도 높아서 꽤 인기를 끌었다. 한때 연간 판매 10만 대를 넘길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티코가 국민차로써 확고한 지위를 누렸다면 세대를 거듭하며 지금까지도 이어졌겠지만, 아쉽게도 10년 만인 2000년 단종됐다.

국민차의 정의는 내리기 나름인데, 일반적으로 누구나 어려움 없이 살 수 있고 유지 관리하는데 큰돈이 들지 않는 차를 가리킨다. 티코는 이 정의에 딱 들어맞는다. 티코 이후에 비슷한 콘셉트를 지닌 차는 나오지 않았다. 경차가 나오기는 했지만 티코보다 크기는 커지고 엔진 배기량도 늘고 연비는 낮아졌다. 기름기를 쫙 빼기보다는 경차답지 않게 이것저것 많이 집어넣어서 가격도 비쌌다. 극한 실용성과는 거리가 좀 있지만 그래도 경차는 국민차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차다.



경차뿐만이 아니다. 소형차는 물론 준중형차까지는 국민차로 봐줄 만하다. 실제로 다른 여러 나라는 준중형급 이하 차들이 가장 많이 팔린다. 일본은 경차 비중이 40%에 달한다. 유럽 각국 베스트셀러는 폭스바겐이나 푸조, 르노 등이 만드는 소형차나 준중형 해치백이 차지한다. 이런 추세는 큰 변동 없이 이어져서, 차종은 달라지더라도 차급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상황이 좀 다르다. 차급이 꾸준하게 바뀌었다. 티코 이후 변화를 살펴보면, 소형차에서 준중형차, 중형차, 준대형차로 꾸준하게 커졌다. 차종은 주로 현대자동차 모델이 차지했다. 준중형 아반떼, 중형 쏘나타, 준대형 그랜저 등. 그랜저는 크기도 크기이지만 고급차에 속한다. 올해 상반기 들어 그랜저는 5만1753대가 팔려 판매 1위를 차지했다. 지난해에도 1위를 차지했는데 13만2080대를 기록했다. 그전까지 그랜저는 상위권은 유지했지만 쏘나타나 아반떼에는 밀렸다. 2016년 말 그랜저 신형이 나오면서 확실하게 국민차로 자리 잡아가는 모양새다.



그랜저가 국내 대표 모델로 자리 잡으면서 쏘나타의 위상 변화도 눈에 띈다. 아반떼를 제치고 쏘나타가 국민차가 된 지는 꽤 오래됐다. 중형차가 국민차라는 사실에 논란도 많았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덩치 큰 중형차가 많이 팔리는 현상은 비정상이다, 땅도 좁은데 큰 차가 많이 팔리면 어떻게 하냐는 등 부정적인 의견이 나왔다. 큰 차만 선호하는 취향을 비판하거나, 자기만족보다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소비 행태를 문제 삼는 주장도 있었다. 논란과는 별개로 쏘나타는 잘 팔렸다. 그런데 탄탄해 보이던 쏘나타도 그랜저 앞에 무너졌다. 쏘나타 정도로도 국민차 논란이 일었는데, 더 크고 고급스럽고 비싼 그랜저가 국민차 자리를 꿰찼다. 국민차의 기본 개념과는 더 멀어졌다.



준대형 고급차가 가장 많이 팔리는 우리나라 시장은 정상일까, 비정상일까? 비단 국산차시장 뿐만 아니라 수입차시장에서도 크고 비싼 차들이 잘 팔린다. BMW 5시리즈나 메르세데스-벤츠 E-클래스가 오래전부터 상위권을 독식해오고 있다. 경제 규모나 소득 수준, 지리적 특성 등을 고려하면 그랜저가 잘 팔리는 현상은 비정상이지만, 크고 비싼 차 좋아하는 시장 취향에 비추어 본다면 비정상은 아니다. 그리고 자동차시장 최신 트렌드는 고급화다. 대중차를 타던 사람들이 고급차로 갈아타는 추세다. 그랜저가 가격이 싼 편은 아니지만 가격 대비 성능에서는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산차 구매자들이 필요로 하는 부분을 잘 간파해 만족도가 높다.

자동차 판매는 여러 요소의 영향을 받지만 기본은 제품력이다. 사고 싶은 차를 사겠다는데 말릴 수는 없다. 국민차 정신에 어긋나니 작은 차를 사라고 강요하기도 힘들고 해서도 안 된다. 큰 차 선호하는 취향을 탓하며 작은 차 타기 운동이라도 벌여 정신개조를 할 수도 없다.



국민차의 정의에 대해서도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한다. 작은 크기와 높은 연비, 싼 가격이 국민차의 대표 장점으로 꼽힌다. 그런데 작다고 꼭 연비가 좋지는 않다. 국산 경차들이 경차답지 못하다는 소리를 듣는 이유도 크기에 비해 연비가 좋지 않아서다. 작은 차가 꼭 싸지는 않다. 우리나라야 그런 차가 잘 없지만 해외에는 크면서 싼 차도 나온다. 작은 차가 연비에 유리한 것은 맞지만, 하이브리드를 포함한 파워트레인 다변화와 기술 발달로 큰 차들도 연비가 높게 나온다.

시대 변화에 따라 국민차의 자격 조건도 달라지고 해당하는 차의 범위도 넓어졌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조건이 있다. 접근성이다. 누구나 부담 없이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그랜저는 국민차라고 할 수 없다. 사람마다 달리 받아들이겠지만, 나는 아직도 국민차는 작고 실용적인 차라고 생각한다. 베스트셀러는 시장을 대표하는 차이지 국민차는 아니다. 크기 작고 연비 좋은 차는 국산차 중에도 여럿 있다. 단지 팔리지 않을 뿐. 국민차는 국민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는 아이콘 같은 차다. 누구나 부담 없이, 누구나 마음에 들어서 사는 그런 차다. 큰 차가 국민차로 여겨지는 현실이 불합리한 게 아니라, 제대로 된 국민차가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임유신( 한국판 편집장)

임유신 칼럼니스트 : 자동차 전문지 <카비전>, <모터 트렌드>, <탑기어> 등을 거쳤다. 현재 영국 슈퍼카 전문지 의 한국판 편집장으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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